1982년 8월 14일. 마당에 세운 대나무 곳대에 흰 무명 한 필이 묶여 있다. 무명천 안으로 둥근 매듭 일곱 개가 잡혔다. 김앵순 당골이 천의 끝을 손에 쥐고 무가를 부르며 매듭 하나를 당긴다. 매듭이 풀린다. 두 번째, 세 번째. 한밤의 곳대 옆에 모인 사람들이 그 손끝을 따라간다. 마지막 일곱 번째가 풀리는 순간, 식구들이 짧게 손뼉을 친다. 망자의 한이 풀렸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사진: 고를 풀고 있는 김앵순 당골.
김수남이 촬영한 이 굿은 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행해졌다. 전남 영광군 영광읍 교촌리. 굿을 이끈 사람은 두 명의 당골이다. 김앵순 당골이 오구풀이와 고풀이, 씻김, 길닦음 같은 중심 절차를 맡았고, 신기녀 당골이 성주굿과 제석굿을 맡았다. 잽이는 셋. 고인(鼓人) 김성락(金成樂, 1905년생), 악사 김상구(金相九, 1906년생), 고인 전병기(1920년생). 그해 김성락은 일흔일곱이었고, 김상구도 일흔여섯이었다. 영광의 굿판을 이들이 오롯이 받치고 있었다.
호남 지역에서 무당은 단골이라 불린다. 신을 받은 강신무가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사제권이 세습된 세습무다. 단골은 자기 단골판을 가지고 있고, 그 판 안의 집안과 평생을 함께한다. 사람이 태어나면 안택을 하고, 결혼하면 성주를 모셔주고, 죽으면 씻김을 한다. 남자 식구는 굿의 음악을 맡는다. 남무를 고인(鼓人)이라 부르고 여무를 단골(당골)이라 부른다는 호남의 어법이 이 사람들의 직역을 그대로 보여준다. 김성락이 굿판 옆에서 북을 친 것은 그 직역의 일부였다. 단골판은 한 마을의 종교를 담당하는 일종의 작은 교구였다.

사진: 신기녀 당골이 댓잎가지 끝에 한지를 묶은 성주대를 들고 성주굿을 하는 모습
저녁 무렵 신기녀 당골이 성주굿부터 시작한다. 댓잎가지 끝에 한지를 묶어 성주대를 세우고, 그 앞에 떡과 술과 과일을 놓는다. 굿이 본격 시작되기 전 집안의 신을 먼저 모시는 절차다. 이어 열리는 제석굿. 신기녀 당골이 당금애기 무가를 부르며 농사와 가정의 신을 청한다. 이 두 굿은 망자가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자리다. 씻김굿은 죽은 자를 보내는 굿이지만, 그 시작은 집안의 평안을 비는 데에서 출발한다.
본격적으로 망자를 위하는 굿은 김행순 당골의 오구풀이부터다. 바리데기 무가가 시작된다.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저승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일곱째 딸 이야기다. 바리데기는 부모를 살리기 위해 저승을 다녀온 효녀로, 무속에서 오구신으로 좌정한 뒤 망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는다. 김앵순 당골은 무가의 한 대목을 부른 뒤 빈 시루를 가져와 그 안에 실타래 한 뭉치를 넣었다. 시루 바닥의 작은 구멍으로 실 끝을 뽑아낸다. 망자가 다음 생에 무엇으로 환생할지를 점치는 자리다. 작가는 이 장면에 설명을 붙여두었다.
"망자가 이 세상 다 못살아 원통한데 저 세상 명 길라고 염불한다."

사진: 빈 시루 속에 실타래를 넣어 환생을 점치는 장면.
고풀이는 의례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마당의 곳대에는 흰 무명에 일곱 매듭이 잡혔다. '고'는 매듭이라는 뜻. 무당들은 고를 한자 '苦'(괴로움)로 해석한다. 매듭이자 한이고, 풀어야 할 그 무엇이다. 김앵순 당골이 무가를 부르며 매듭 하나하나에 손을 댄다. 풀린 매듭은 바닥에 늘어지고, 다음 매듭으로 손이 옮겨간다. 매듭을 다 풀고 나면 다시 매듭을 만들어 풀기를 반복한다. 망자 영혼의 수만큼 맺고 풀기를 반복한다. 망자의 한이 한 번에 풀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한이 풀리는 시점이 분명하게 표시된다는 점이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하다. 고가 다 풀리면 식구들과 동네사람들은 망자의 한이 풀렸다고 기뻐한다. 죽음은 한 가족의 사건이지만, 그 슬픔이 풀리는 자리는 공동체의 자리다. 가족만 모이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함께 본다. 매듭이 풀리는 순간 함께 박수를 치고 어깨를 들썩인다.
다음은 씻김. 본 의식이다. 망자의 옷을 돗자리로 말아 몸통을 만들고, 그 위에 주발과 솥뚜껑을 얹어 머리와 갓을 만든다. 김앵순 당골이 쑥물 한 그릇을 떠와 빗자루에 묻혀 신체를 닦는다. 다음은 향물, 마지막은 정화수. 물·쑥물·향물 순서는 호남 씻김굿의 정해진 순서다. 사진 속 당골의 손은 산 사람의 몸을 씻기듯 천천히 움직인다.
씻김이 끝나면 저승길 준비가 시작된다. 마당 한쪽에 큰 독을 놓고, 그 안에 물을 가득 채운다.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안에 밥주발을 넣는다. 물은 저승으로 가는 강이고 바가지는 그 강 위를 떠가는 배가 된다. 망자가 저승으로 떠나는 것을 모형으로 옮긴 자리다. 이어 김앵순 당골이 기주(祈主: 의뢰한 가족)의 머리 위에 망자의 넋을 올리고, 신칼에 매단 지전(紙錢)으로 그것을 옮겨 받는다. 평생을 잘 살고 떠난 사람도 죽음의 순간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 의식은 죽은 사람의 원한을 살아 있는 가족에게서 분리시키는 의미다.
마지막은 질닦음이다. 마룻바닥에 긴 무명 한 필이 펼쳐진다. 이 천이 망자가 갈 극락의 길이다. 이승의 맺힌 한이 매듭지어진 '고'였다가, 그것이 풀린 뒤 같은 베가 길 닦음의 '길'이 된다. 이승의 원한이 풀리면 그로 인해 극락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두 당골이 길의 양 끝에서 천천히 천을 밀어가며 길을 닦는다. 길을 다 닦은 후 춤을 추며 즐거워하고 있다. 사람들의 표정이 슬픔에서 가벼움으로 옮겨가 있다.
새벽이 되자 마당 한쪽에 마른 짚이 놓이고 망자의 옷과 넋이 그 위에 얹어진다. 불이 붙는다. 두 당골이 옷이 다 타들어갈 때까지 곁에 선다. 짚 타는 냄새, 종이 타는 냄새가 마당에 깔린다. 굿이 끝났다.

사진: 악사 김성락(1905년생)·김상구(1906년생)·전병기(1920년생)의 초상
이 굿이 있었던 1982년은, 한국 정부가 진도씻김굿을 처음으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지 2년이 지난 해였다. 진도씻김굿은 1980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기예능보유자로 박병천·채계만·김대례 등이 인정됐다. 영광은 그 목록에 없었다. 전라남도에서는 영광·신안·진도·순천·화순 등 각지에서 세습무가들이 단골판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진도씻김굿을 제외하면 전승이 끊어진 지역이 많았다. 사회 환경의 변화로 단골판이 해체되고, 강신무의 활동에 따라 세습무의 입지가 줄어들면서 사회적 천시까지 받자, 굿을 배우려는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김수남이 영광 교촌리를 찾았을 때 김성락과 김상구는 이미 일흔을 넘었다. 그 다음 세대는 이 직역을 이어받지 못했다.
2025년 10월, 조웅석 보유자의 '화순 능주 씻김굿'이 전라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전남 내륙에서 유일하게 계승되고 있는 전통 씻김굿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영광은 그 목록에도 없었다.

사진: 망자의 옷과 넋을 태우는 마지막 장면.
이 촬영은 두 번 반복될 수 없었다. 굿이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진 마당에는 검게 탄 지푸라기만 남았다. 일곱 개의 매듭은 그 밤에만 묶이고 풀렸다.
1982년 8월 14일. 마당에 세운 대나무 곳대에 흰 무명 한 필이 묶여 있다. 무명천 안으로 둥근 매듭 일곱 개가 잡혔다. 김앵순 당골이 천의 끝을 손에 쥐고 무가를 부르며 매듭 하나를 당긴다. 매듭이 풀린다. 두 번째, 세 번째. 한밤의 곳대 옆에 모인 사람들이 그 손끝을 따라간다. 마지막 일곱 번째가 풀리는 순간, 식구들이 짧게 손뼉을 친다. 망자의 한이 풀렸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사진: 고를 풀고 있는 김앵순 당골.
김수남이 촬영한 이 굿은 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행해졌다. 전남 영광군 영광읍 교촌리. 굿을 이끈 사람은 두 명의 당골이다. 김앵순 당골이 오구풀이와 고풀이, 씻김, 길닦음 같은 중심 절차를 맡았고, 신기녀 당골이 성주굿과 제석굿을 맡았다. 잽이는 셋. 고인(鼓人) 김성락(金成樂, 1905년생), 악사 김상구(金相九, 1906년생), 고인 전병기(1920년생). 그해 김성락은 일흔일곱이었고, 김상구도 일흔여섯이었다. 영광의 굿판을 이들이 오롯이 받치고 있었다.
호남 지역에서 무당은 단골이라 불린다. 신을 받은 강신무가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사제권이 세습된 세습무다. 단골은 자기 단골판을 가지고 있고, 그 판 안의 집안과 평생을 함께한다. 사람이 태어나면 안택을 하고, 결혼하면 성주를 모셔주고, 죽으면 씻김을 한다. 남자 식구는 굿의 음악을 맡는다. 남무를 고인(鼓人)이라 부르고 여무를 단골(당골)이라 부른다는 호남의 어법이 이 사람들의 직역을 그대로 보여준다. 김성락이 굿판 옆에서 북을 친 것은 그 직역의 일부였다. 단골판은 한 마을의 종교를 담당하는 일종의 작은 교구였다.
사진: 신기녀 당골이 댓잎가지 끝에 한지를 묶은 성주대를 들고 성주굿을 하는 모습
저녁 무렵 신기녀 당골이 성주굿부터 시작한다. 댓잎가지 끝에 한지를 묶어 성주대를 세우고, 그 앞에 떡과 술과 과일을 놓는다. 굿이 본격 시작되기 전 집안의 신을 먼저 모시는 절차다. 이어 열리는 제석굿. 신기녀 당골이 당금애기 무가를 부르며 농사와 가정의 신을 청한다. 이 두 굿은 망자가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자리다. 씻김굿은 죽은 자를 보내는 굿이지만, 그 시작은 집안의 평안을 비는 데에서 출발한다.
본격적으로 망자를 위하는 굿은 김행순 당골의 오구풀이부터다. 바리데기 무가가 시작된다. 자기를 버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저승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일곱째 딸 이야기다. 바리데기는 부모를 살리기 위해 저승을 다녀온 효녀로, 무속에서 오구신으로 좌정한 뒤 망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맡는다. 김앵순 당골은 무가의 한 대목을 부른 뒤 빈 시루를 가져와 그 안에 실타래 한 뭉치를 넣었다. 시루 바닥의 작은 구멍으로 실 끝을 뽑아낸다. 망자가 다음 생에 무엇으로 환생할지를 점치는 자리다. 작가는 이 장면에 설명을 붙여두었다.
"망자가 이 세상 다 못살아 원통한데 저 세상 명 길라고 염불한다."
사진: 빈 시루 속에 실타래를 넣어 환생을 점치는 장면.
고풀이는 의례의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마당의 곳대에는 흰 무명에 일곱 매듭이 잡혔다. '고'는 매듭이라는 뜻. 무당들은 고를 한자 '苦'(괴로움)로 해석한다. 매듭이자 한이고, 풀어야 할 그 무엇이다. 김앵순 당골이 무가를 부르며 매듭 하나하나에 손을 댄다. 풀린 매듭은 바닥에 늘어지고, 다음 매듭으로 손이 옮겨간다. 매듭을 다 풀고 나면 다시 매듭을 만들어 풀기를 반복한다. 망자 영혼의 수만큼 맺고 풀기를 반복한다. 망자의 한이 한 번에 풀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한이 풀리는 시점이 분명하게 표시된다는 점이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하다. 고가 다 풀리면 식구들과 동네사람들은 망자의 한이 풀렸다고 기뻐한다. 죽음은 한 가족의 사건이지만, 그 슬픔이 풀리는 자리는 공동체의 자리다. 가족만 모이지 않는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함께 본다. 매듭이 풀리는 순간 함께 박수를 치고 어깨를 들썩인다.
다음은 씻김. 본 의식이다. 망자의 옷을 돗자리로 말아 몸통을 만들고, 그 위에 주발과 솥뚜껑을 얹어 머리와 갓을 만든다. 김앵순 당골이 쑥물 한 그릇을 떠와 빗자루에 묻혀 신체를 닦는다. 다음은 향물, 마지막은 정화수. 물·쑥물·향물 순서는 호남 씻김굿의 정해진 순서다. 사진 속 당골의 손은 산 사람의 몸을 씻기듯 천천히 움직인다.
씻김이 끝나면 저승길 준비가 시작된다. 마당 한쪽에 큰 독을 놓고, 그 안에 물을 가득 채운다.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우고, 그 안에 밥주발을 넣는다. 물은 저승으로 가는 강이고 바가지는 그 강 위를 떠가는 배가 된다. 망자가 저승으로 떠나는 것을 모형으로 옮긴 자리다. 이어 김앵순 당골이 기주(祈主: 의뢰한 가족)의 머리 위에 망자의 넋을 올리고, 신칼에 매단 지전(紙錢)으로 그것을 옮겨 받는다. 평생을 잘 살고 떠난 사람도 죽음의 순간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 의식은 죽은 사람의 원한을 살아 있는 가족에게서 분리시키는 의미다.
마지막은 질닦음이다. 마룻바닥에 긴 무명 한 필이 펼쳐진다. 이 천이 망자가 갈 극락의 길이다. 이승의 맺힌 한이 매듭지어진 '고'였다가, 그것이 풀린 뒤 같은 베가 길 닦음의 '길'이 된다. 이승의 원한이 풀리면 그로 인해 극락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뜻이다. 두 당골이 길의 양 끝에서 천천히 천을 밀어가며 길을 닦는다. 길을 다 닦은 후 춤을 추며 즐거워하고 있다. 사람들의 표정이 슬픔에서 가벼움으로 옮겨가 있다.
새벽이 되자 마당 한쪽에 마른 짚이 놓이고 망자의 옷과 넋이 그 위에 얹어진다. 불이 붙는다. 두 당골이 옷이 다 타들어갈 때까지 곁에 선다. 짚 타는 냄새, 종이 타는 냄새가 마당에 깔린다. 굿이 끝났다.
사진: 악사 김성락(1905년생)·김상구(1906년생)·전병기(1920년생)의 초상
이 굿이 있었던 1982년은, 한국 정부가 진도씻김굿을 처음으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지 2년이 지난 해였다. 진도씻김굿은 1980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기예능보유자로 박병천·채계만·김대례 등이 인정됐다. 영광은 그 목록에 없었다. 전라남도에서는 영광·신안·진도·순천·화순 등 각지에서 세습무가들이 단골판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진도씻김굿을 제외하면 전승이 끊어진 지역이 많았다. 사회 환경의 변화로 단골판이 해체되고, 강신무의 활동에 따라 세습무의 입지가 줄어들면서 사회적 천시까지 받자, 굿을 배우려는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김수남이 영광 교촌리를 찾았을 때 김성락과 김상구는 이미 일흔을 넘었다. 그 다음 세대는 이 직역을 이어받지 못했다.
2025년 10월, 조웅석 보유자의 '화순 능주 씻김굿'이 전라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 전남 내륙에서 유일하게 계승되고 있는 전통 씻김굿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영광은 그 목록에도 없었다.
사진: 망자의 옷과 넋을 태우는 마지막 장면.
이 촬영은 두 번 반복될 수 없었다. 굿이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진 마당에는 검게 탄 지푸라기만 남았다. 일곱 개의 매듭은 그 밤에만 묶이고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