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넋을 씻는 장산도 당골의 노래, 신안 씻김굿

Editor
2026-04-19
조회수 145

씻김굿에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한을 토로하는 거리가 없다. 대신 삶에 맺혀 있는 응어리로 일곱개의 고를 맺어 무녀가 아름답고 단순한 춤으로 그것을 풀어줄 따름이다. 천마디, 만마디의 넋두리가 소박한 징가락에 담긴 채 춤을 춘다. 야무지게 맺힌 고가 하나씩 풀려가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망자가 이승의 결박에서 풀려 자유로워지는 과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고풀이는 가장 절제되고 예술적으로 형상화된 한풀이의 절정이라고 하겠다. - 황루시, 한국의굿 '전라도 씻김굿' 편 中


1980년 8월 17일,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면 마초리부락. 습한 바닷바람을 뚫고 징 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진다. 찌는 듯한 무더위와 극성스러운 모기떼 속에서 벌어진 씻김굿의 주인공은 세상을 떠난 지 15년이 넘은 이귀석, 20년이 지난 이복동, 그리고 이귀설 세 형제였다.


109O1-121980JPGE.jpg


부엌 부뚜막 위에 조그만 첫상을 차려놓고 징을 두드리며 부정을 물리는 조왕반 절차. 굿의 시작이다.



이날의 굿은 일반적인 굿판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굿을 주관하는 '당골(세습무)' 가족이 바로 죽은 이들의 혈육이었기 때문. 피리와 장고의 명인 이귀인(1928~2016)을 중심으로, 아내 강부자, 누이 이화단, 질부 진금순이 함께 형제들의 넋을 불러냈다. 평소 남의 한(恨)을 풀어주던 사제(司祭)들이었던 이들은 이날은 동시에 형제들의 죽음 앞에서 굿을 요청한 상주이기도 했다.


이승의 공간에서 맺힌 고를 풀다


씻김굿의 시작은 집안의 가장 깊숙한 공간인 부엌의 '조왕반'에서 시작해 안방의 '안당'으로 이어진다. 당골 강부자는 댓잎가지 끝에 하얀 종이를 묶은 성주대를 들고 집안의 안녕을 빌었다. 그리고 굿의 무대는 안당을 넘어 마당으로 향한다.

025O1-121980JPGE.jpg

안당굿에서 진금순 당골이 하얀 지전을 손에 들고 춤을 추며 신을 청하고 있다.

141O1-121980JPGE.jpg

진금순 당골이 고풀이 서사무가를 부르며 망자의 맺힌 원과 한을 상징하는 매듭인 '고'를 풀어내고 있다.


마당에 세워진 기둥에는 일곱 개의 매듭이 묶인 무명천이 걸린다. 당골은 신칼을 들고 춤을 추며 이 매듭, 즉 '고'를 하나하나 풀어낸다. 살아서 못 먹고 못 입고, 제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한 망자의 억울한 사정들이 이 매듭에 담겨 있다. 매듭이 스르르 풀릴 때마다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은 "넋이라도 오셨네"라며 추임새를 넣고, 비로소 망자가 자유로워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짚자리와 솥뚜껑으로 만든 마지막 목욕

장산도 씻김굿의 하이라이트는 '영돈말이'와 '씻김'. 이 절차는 남해안 도서 지방의 독특한 장묘 풍습인 '초분'과도 맞닿아 있다. 초분은 시신이 썩어 뼈만 남으면 이를 깨끗이 씻어 다시 묻는 풍습인데, 굿판에서도 망자의 상징적 신체를 정성껏 씻긴다.

035O1-121980JPGE.jpg

영돈말이. 망자의 옷을 짚자리로 싸고 일곱 매듭으로 묶어 만든 신체 위에 솥뚜껑을 덮고 쑥물과 향물로 정성스럽게 씻긴다.


짚자리로 둘둘 만 망자의 옷 위에 솥뚜껑을 덮는다. 당골은 쑥물과 향물을 적신 빗자루로 망자를 정성껏 닦아낸다. 일상적인 밥주발과 솥뚜껑이 이 순간만큼은 성스러운 제구(祭具)로 변한다. 비누칠까지 더해 망자의 죄를 씻어낸 당골은 솥뚜껑을 열어 저승문이 열렸음을 선포한다. 이때 가족들은 짚자리를 붙들고 통곡하며 마지막 이별을 예감한다.


무명천을 타고 저승 바다를 건너다

씻김이 끝나면 이승과 저승을 잇는 긴 다리가 놓인다. 안방에서 마당 끝까지 길게 펼쳐진 흰 무명천 '질베'다.

039O1-121980JPGE.jpg

'질닦음'. 안방에서 마당으로 길게 펼쳐진 무명천(다리) 위에서 넋상자를 오르내리며 망자가 극락으로 가는 길을 닦아주고 있다.


당골은 넋이 담긴 주발과 망자의 옷을 넣은 대바구니를 들고 이 천 위를 천천히 오간다. 이 길은 망자가 건너야 할 아득한 바다이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하직의 길. 김수남 작가가 포착한 1980년 장산도의 사진 속에는 질베 주위에 놓인 노자돈과 촛불이 선명하다. 당골은 "가자스라 가엾은 망재씨, 이 씻김 받고 왕생극락 하자스라"며 애달픈 염불을 읊조린다.

151O1-121980JPGE.jpg

넋을 씻긴 후 망자의 저승길을 닦아주기 위해 쌀과 망자의 옷, 넋이 든 대바구니(넋상자)를 들고 염불을 하는 모습.


슬픔을 신명으로 바꾸는 굿

굿의 마무리는 뜻밖에도 흥겨운 '망자놀이'다. 길을 다 닦은 당골은 넋상자를 흔들며 빠른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이제 망자는 모든 한을 풀고 좋은 곳으로 갔으니, 남은 이들은 더 이상 슬퍼하지 말고 생업으로 돌아가자는 약속이다. 김수남 작가는 "전라도 예향의 맛이 굿에서도 흘러넘친다"며 그 소리와 춤이 맺힌 것을 풀어내는 힘을 예사롭지 않게 보았다.

210O1-121980JPGE.jpg

망자는 극락으로 천도했고, 무녀는 기쁜 일을 축하하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바탕 춤을 춘다. 죽음과 삶은 이 단계에서 완전히 구별된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이승의 삶에 더 충실해질 수 있도록 돕는 것 또한 씻김굿의 역할이다.

0 0